갓 태어난 ‘명나라’를 대국으로 섬기고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며, 5만 대군을 위화도에서 되돌린 이성계의 ‘이씨조선’과 함께 본격화한 사대(事大)는 아직도 우리 말과 글에 고스란히 남아 우리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우선 우리 민족을 가리킬 때 자주 등장하는 ‘한’이라는 우리말은 ‘크다, 중심, 밝은’을 뜻하는 것으로 굳이 한자로 옮기자면 일반적으로 ‘韓’으로 표시합니다. 지나(支那,China)의 ‘漢’과는 구분해서 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자를 지나를 암시하는 나라이름 漢(한)을 사용해 ‘漢字(한자)’라고 쓰고 마치 ‘지나’의 문자를 빌어 쓰는 것인양 오해를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지나(支那,China)는 한자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지나(支那,China)는 오래전부터 한자를 자신의 것 인양,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해 왔습니다.

그러나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와 세계 언어학계는 한자를 지나의 문화유산으로 인정치 않았습니다.

‘지나’의 국민감독이라 불리는 장예모 감독은 2008년 뻬이징 올림픽 개막식 행사에서 한자를 소재로 한 멋진 퍼포먼스를 선보였으나 역부족이었습니다.

상당수의 한자들이 우리 민족의 문화, 역사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집 ‘가(家)’자입니다. ‘집’을 뜻하는 ‘면(宀)’자 아래에 돼지 ‘豕(시)’자가 자리해 있습니다. 사람과 소, 돼지가 한 집안에서 함께 생활하는 문화를 지닌 민족은 우리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집안에 ‘소 우리’가 달려 있는 시골 집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지나’에는 이런 문화가 없습니다.

‘아리수’라 불러 온 ‘민족의 젖줄’ 한강 역시 ‘지나의 강’인양, 漢江이라 쓰고 있습니다. 네이버 지식인을 살펴보면 우리의 강인 한강을 왜 우리 민족의 이름인 韓을 붙여 韓江이라 쓰지 않고 지나의 이름인 漢을 내세워 漢江으로 쓰고 있느냐는 질문이 많이 올라와 있습니다.

네이버에 게시된 이 질문에 대한 답 글은 크게 두가지로 나뉘어 집니다.


하나는 고려말 이조년의 시조에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제...'라는 구절이 있는데, ‘시간이 흘러 은하수가 기울어 3경(한밤중)이 되었다는 뜻’이라면서 漢江의 漢은 지나의 이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은하수를 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조년의 시조가 한강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의문스럽습니다. 이조년은 한강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시간이 흘러감을 묘사했을 뿐인데, 이를 두고 ‘은하수’라는 뜻을 담아 漢江이라 썼다고 하니, 왠지 앞뒤가 맞지 않아 보입니다.

또 다른 답변은 漢江은 漢水에서 유래된 말로 원래 漢水라고 불리던 강은 우리 민족이 왕성하게 활동했던 대륙, 즉 지금의 지나 땅에 자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역사를 한반도로 축소하면서 대륙에 있던 강 이름을 한반도 안으로 그대로 옮겨 왔다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도 무리가 있는 듯 합니다. 우선 우리 민족이 대륙에서 활동할 당시 큰 강을 기준으로 근거지로 삼았다면, 그 강의 명칭은 지나를 뜻하는 漢水가 아니라, 당연히 한민족을 상징하는 韓水였어야 했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설령 우리 민족의 활동 근거지였던 대륙에 위치한 큰 강의 이름이 漢水였다고 하더라도, 굳이 지리적으로 편차가 있는 한반도내 강 이름을 漢水로 이름 짓는 것이 타당하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漢水라는 이름은 우리 민족이 지은 이름이 맞을까요?

눈여겨 봐야 할 점은 일제는 '고조선'의 강역을 한반도로 축소시키려 조작을 서슴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일제는 한나라가 짧게나마 고조선을 누르고 설치한 한사군을 과장해서 식민통치의 명분을 정당화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대륙의 역사를 지우고자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를 한반도로 축소하기 위해 날조와 왜곡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일제는 과연 지나인의 이름을 빌어, 우리 민족이 중원과 겨루며 왕성한 활약을 벌였던 요서 또는 요동에 위치한 강을 오늘날 한강(漢江)으로 끌어내려 탈바꿈 시켰을까요?

실제로 한사군을 둘러싼 일제의 역사조작이 우리 역사학계에 의해 덜미를 붙잡히기도 했습니다.

손보기 전 연세대 교수는 1990년 일제에 의해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의 위치가 요서에서 평안남도로 이동한 근거를 제기했습니다.

하늘에 제사를 드리고, 낙랑군의 경계를 표시한 것으로 알려진 '점제현신사비'가 바로 그 것입니다. 손 교수에 따르면 당초 요서지역에 위치했던 갈석산에는 신사비 크기의 바위를 쪼아낸 자국이 있으며, 신사비의 돌을 조금 떼어내 갈석산의 돌과 맞춰본 결과 정확하게 일치했습니다. 반면 평남지방에서는 신사비에 쓰인 암석의 재질을 찾아 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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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랑군 점제현신사비의 이동 경로

 한나라 무제가 위만조선과의 전쟁으로 얻은 한사군은 저마다 다른 변천과정을 거치며 30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낙랑군만 남긴채 모두 소멸합니다. 낙랑군 또한 고구려 미천왕에 의해 복속됩니다.

뿐만 아니라 남북의 역사학계는 ‘낙랑군 평양설'은 날조된 것이며, 낙랑군 또한 낙랑국으로서 고조선 유민들이 건설한 나라’라는 연구결과를 속속 내놓기에 이르렀습니다.


지나의 이름을 빌린 한강(漢江), 한수(漢水)란 이름은 서울의 옛 이름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우리는 ‘서울’의 옛말인 한양 또한 지나(支那,CHINA)를 상징하는 글자인 한(漢)을 갖다 붙여 한양(漢陽)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한양(漢陽)이란 말은 한수(漢水)이북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강의 북쪽에 위치한 땅에는 양(陽), 강의 남쪽에 위치한 땅에는 음(陰)이라 한데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음양의 철학은 지나의 주역, 즉 음(陰)과 양(陽) ‘이태극’으로 대변되는 것입니다.
강을 사이에 두고 음와 양으로 나눠 해석하고 이름 붙이는 것은 우리의 하늘(天) 자연(地) 사람(人)의 조화를 뜻하는 ‘삼태극’과는 궤를 달리하는 것으로 지나쪽에 가까워 보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한강을 漢水, 漢江으로 쓰면서, 서울의 옛 명칭 또한 지나의 이름인 ‘漢’을 자연스레 붙이게 됐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지나의 ‘동북공정’에 비춰볼 때, 한국 사람들이 스스로 ‘한양(漢陽)’이란 표현을 사용하는 점을 들어 ‘서울은 본래 지나의 땅이었다’는 엉뚱한 해석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고구려(가우리)역사 훔치기'에 혈안이 돼 있는 ‘지나’를 두고, 우리는 中國이라 높이며 받들고 있습니다. 中國은 ‘중심의 나라’란 뜻을 담고 있는 우리 민족의 이름 ‘가우리’의 한자어입니다. 말하자면 ‘고구려’의 뜻을 새긴 한자이름입니다.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변두리를 뜻하는 ‘支那’를 ‘中國’이라 부르는 나라는 한국뿐입니다. 일본은 지나(CHINA)를 ‘支那’라고 쓰고, 부릅니다.

우리 선조들은 스스로 ‘세상의 중심’이라 하여 ‘가우리’(KOREA의 원형)라 말했고, 지구촌 사람들 또한 ‘가우리’를 ‘코리아(KOREA)’, ‘지나’를 ‘차이나(CHINA)’라 불러 왔습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우리가 ‘지나’를 中國이라 부르는 것은 선조의 이름을 헌납하고 스스로‘변두리’라 여기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지나’가 스스로 ‘중심의 나라’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0년에 지나지 않습니다. 100여년전 ‘지나’는 한일합방때, 우리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서 우리 선조의 이름을 슬쩍 베껴 온 것입니다.

좋은 것을 베껴 온 다음, 시간이 흐른 뒤 자기 것으로 만드는 지나인들의 독특한 성향은 과거 서북(티벳)공정이나, 지금의 동북공정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우리는 '지나(CHINA)'의 의미를 담은 나라이름 '漢'의 사용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서 '漢字', ‘漢文’이라고 쓰기 보다는, ‘한겨레’를 의미하는 ‘韓(한)’을 덧붙여, ‘韓字(한자)’, ‘韓文(한문)’이라고 써야 합니다. 과거 ‘漢醫’라고 쓰던 것을 ‘韓醫(한의)’로 바로 잡은 것처럼, ‘漢江’은 ‘韓江(한강)’, ‘漢陽’은 ‘韓陽(한양)’으로 고쳐 써야 합니다.

어찌 한강이 ‘지나의 강’이며, 서울이 ‘지나의 밝은 땅’이 될 수 있겠습니까? 한강은 한겨레의 강이며, 서울은 한겨레의 밝은 땅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중심’, 즉 中國은 변두리 ‘지나(CHINA)’가 아니라 가우리 ‘코리아(KOREA)’임을 잊어선 안 될 것입니다.

‘가우리(고구려)’의 역사가 자기 것이라는 지나의 동북공정에 반박하기에 앞서, 우리 속에 남아 일제강점기를 거쳐 수천년간 끊이지 않고 있는 ‘지나’의 흔적, 한사군(漢四郡)의 찌꺼기부터 걷어내야 합니다.

일제는 한사군 설치를 나타낸 비석마저 대륙에서 한반도로 옮겨 올 만큼 주도 면밀하게 우리 역사를 한반도로 축소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대륙에 위치한 漢四郡과 우리 민족의 주요무대에 자리했던 漢水를 ‘아리수’와 ‘욱리하’로 불리던 지금의 한강으로 끌어내려야 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덧붙여 대륙에 위치한 漢水라는 강의 이름 또한 漢四郡설치이전, 즉 우리 민족이 점유하고 있었을 때에도 과연 漢이란 글자를 사용했을까 하는 의문이 남습니다.

정히 한강을 韓江이라 부르기 어렵다면 차라리 ‘아리수’로 부르는 게 나을 듯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한양’이라는 이름도 자연스레 퇴색하지 않을런지요?

오래전 지나의 역사학자가 김포공항에서 서울시내로 들어오는 길 옆으로 흐르는 한강을 보면서, "오~ 한지앙" "한지앙" 하며 감탄사를 연발하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마치 자신들의 땅을 되찾은 듯한 유쾌하지 못했던 미소가 아직도 생생합니다. 

말과 글은 사람들이 생각을 표현하고 나누는 도구입니다. 그리고 이름은 사물과 생명체, 그리고 사람과 공동체의 정체성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별 생각없이 붙인 이름으로 인해 훗날 엉뚱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이를 테면 ‘가우리’ 고구려 역사의 편입을 시도하고 있는 지나가 훗날 '가우리'의 후손이라는 우리나라가 그들을 가리켜 ‘가우리’ 고구려의 뜻을 새긴 한자어 ‘中國’이라 스스로 부르고 인정했다는 점을 들어 이상한 역사를 정당화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이것이 ‘괜한 근심’이라 흘리고 싶지만, 과거에 고구려가 그들의 역사라는 오늘날 ‘동북공정’을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었습니까?

적어도 ‘밝은’ ‘중심’ ‘큰’ 이란 삼태극의 이념을 담고 있는 우리 민족 고유의 ‘한(韓)’과 관련한 말과 글에 대해선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한글로 쓰인다고 할지라고 우리 민족을 뜻하는 ‘한(韓)’과 지나를 뜻하는 ‘한(漢)’은 엄연히 구분돼 사용됐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사람들의 생각을 표현하고 나누며, 역사를 기록하는 말과 글을 너무 가볍게 다루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우리 말과 글로 정체성을 확인하는 언론이 나서서 그동안 잘 못 방치돼 온 우리 말과 글, 이름을 한번쯤 가다듬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래서인지 우리 말과 글로 먹고 사는 언론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보도성향을 떠나서 사려 깊은 말과 글의 표현은 언론의 뿌리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서울의 옛 이름이 漢陽이랍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지나(CHINA)의 밝은 땅’입니다. 아무리 의미를 덧붙여 본들, 그것이 우리 이름이 아니라는 느낌은 어찌할 도리가 없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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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리는 일요일. 정오부터 오후내내 눈이 내렸습니다.
눈내리는 휴일에도 불구하고 중국집 음식점 편의점 대리운전 택배에 이르기 까지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너무 추워 찾는 사람이 없는데다 가스값까지 치솟아 장사하면 손해라며 빵 굽기를 포기한 붕어빵집을 제외하곤 여느 평일과 다름없는 하루였습니다. 서민들의 삶은 일요일 내리던 눈도 어쩌지 못할 만큼 그렇게 바삐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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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층 빌딩에서 내려본 인덕원 사거리 모습입니다. 눈내리는 일요일도 아랑곳없이 많은 사람들은 어디론가 여전히 바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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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덕원역 7번 출구에서 나와 10걸음 정도 걸으면 본죽 가맹점이 있습니다. 2월18일까지인가 본죽에서 판촉 아이디어 공모 이벤트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홍보 포스터에 담긴 글이 걸작입니다. 내용인즉 '등록금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취업문은 잘수록 좁아만 지니 더 이상 내 어찌 가만히 두고 볼 수 있겠는가. 본죽은 흉흉한 민심을 달래고 뛰어난 인재를 등용하고자 하니 관심있는 이들의 많은 참여를 바라오.' 입가에 미소가 번졌으나 마냥 웃을 수만 없는 얘기여서 금새 어깨가 무거워졌습니다. 공모전에서 아이디어로 채택되면 상금이 700만원이라고 합니다. 저도 자격이 되면 한번 도전해 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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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리고 추운날씨. 그것도 일요일인데도 누군가 아침부터 주차한 차위로 대리운전 홍보 전단을 꼽고 갔습니다. 눈이 쌓이지 않은 것으로 봐서 그리 오랜시간이 지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요즘 나가는 돈에 비해 들어온는 돈이 부족하다보니 이렇게 대리운전을 하면서 Two Job을 뛰는 중년 가장들이 늘고 있다고 합니다. 눈은 내리지만 부디 오늘 손님들 많이 받으시고, 안전운전 하시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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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붕어빵집입니다. 오늘도 붕어빵을 사먹으러 들렀는데 역시나 문을 닫았습니다. 얼마전 아주머니께 왜 붕어빵 안파세요? 라고 물으니 "날이 너무 춥다보니 거리에 사람이 없어... 있어도 집에 가기 바빠서 붕어빵은 쳐다도 보지 않는다"며 "가뜩이나 LPG가스값이 올라서 인건비는 커녕 가스비도 못 챙기니 장사를 안하는 게 낫다"며 한숨쉬던 모습이 선합니다. 그래도 나는 붕어빵 먹고 싶었는데... 이건 뭐 공동구매라도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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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로변 건널목에 택배 오토바이가 보입니다. 휴일은 택배를 하지 않는 걸로 아는데... 아마 주말에도 급한 물건을 전달하는가 봅니다. 눈 길 조심하시고 돈 많이 버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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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집이 위치한 골목 입니다. 향원이라고 씌어진 배달용 오토바이 세대가 나란히 서 있습니다. 오토바이들을 뒤로 하고 아저씨가 쌓이는 눈을 쓸어내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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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놀이터앞 사거리 입니다. 멀리 철가방을 뒤에 얹고 달려가는 중국집 배달 오토바이가 보입니다. 눈내리는 일요일에도 중국집은 멈추지 않습니다. 참 열심히들 사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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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로변 편의점 앞입니다. 비슷한 얼굴의 두분이이 주로 새벽시간 출근해서 일하시는데 제가 보니 형제 같았습니다. 오늘 또 그분들과 비슷한 얼굴의 앳띤 소녀가 편의점 앞을 쓸고 있습니다. 아마두분 형제중 한분의 따님이신 듯 합니다. 내가 사진을 찍으려 앞으로 가니. 깜짝놀라는 바람에 뒤로 와서 좀 멀리서 찍어봤습니다. 이 곳 편의점은 사람들이 그리 붐비는 편은 아닙니다. 아마 담배를 팔지 못하는 것도 그 이유중 하나일 듯 합니다. 주변에 담배가게가 워낙 많다보니... 어쨋든 새벽에 잠도 못자고 고생 많이 하시는 데, 장사 잘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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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은편 아파트 상가위에 만들어진 정원과 나무가지위에도 눈이 쌓여갑니다. 아침부터 조금씩 나풀나풀 내리던 눈이 오후 늦게 어느새 굵게 변하며 세차게 뿌려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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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들이 다닥 다닥 붙은 주택가입니다. 눈이 곳곳에 쌓인 이 곳에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살아간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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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온사인과 함께 보이는 건물이 인덕원성당이고, 그 뒤로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첨탑 건물이 동은교회입니다.
제가 주말마다 들리는 동은교회는 유난히 오늘따라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평상시의 2배 가량 모인 것 같았습니다. 설교를 하는 목사님도 신이 나셨더군요. 부디 하늘에서 이뤄진 것과 같이 인덕원에서도 이뤄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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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 사회의 화두로 등장한 복지(福祉). 대체 그 속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래 정부, 국회, 언론, 인터넷이 그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까요?

 

여기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먼저 '복지(福祉)'라는 한자어에 담긴 의미를 살펴봤습니다.

 

복지(福祉)는 시(示)와 일(一), 구(口), 전(田), 그리고 다시 시(示)와 지(止)로 구성돼 있습니다. 두개의 한자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시(示)는 ‘가르치다’, ‘명령하다’, ‘베풀다’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시(示)는 특히 ‘믿다’, ‘알리다’, ‘펴다’, ‘베풀다’란 뜻의 신(申)이 함께하는 신(神)과 같은 뜻을 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복(福)은 앞서 뜻을 따져 본 示와 함께 하나의(一) 입(口)에 밭(田)을 베푼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지(祉)는 신(神)을 의미하는 示, 여기에 ‘금하다’, ‘법’이란 뜻의 지(止)를 합쳤습니다.

 

그러니까 복지는 ‘(神이) 한사람씩 일정한 땅을 분배해서 베푼다'란 뜻의 福(복), 그리고 ‘(神이) 금할 것을 명령한다’는 의미의 지(祉)가 서로 뜻을 섞어 만들어진 낱말입니다.

 

쉽게 말해 '복지란 부와 생산 수단을 평등하게 나눠 갖게 하고(참고 http://j.mp/ewtifK ), 이를 (어길 경우) 통제한다'는 뜻입니다. 결국 '복지'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명령과도 같은 '강제'이자 '의무'인 것입니다.

 

재밌는 사실은 복을 베풀면서 동시에 이에 대한 통제의 뜻을 함께 담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복에 눈이 먼 사람의 탐욕을 경계하는 의미를 띠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경제시스템은 계속해서 부를 팽창을 하지 않으면 무너져 버리는 속성을 띠고 있습니다. 이는 기업이 커지면 커질수록 속도를 늦추거나 멈추면 위험해지는 폭주기관차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나라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고성장을 지속하며 G2의 지위에 오른 오늘날의 지나(CHINA) 경제 또한 내부를 들여다보면 이런 문제를 앓고 있습니다.

 

정부에 의해 의도된 지나(CHINA)경제는 성장세가 꺾이거나 멈춰버리면, 잠재돼 있던 여러 후유증과 부작용에 시달릴 것을 우려해 속도를 늦추거나 멈추지 못하는 폭주기관차로 불리우기도 합니다.

 

지나가 수출을 비롯한 자국 경제의 성장세를 지탱하기 위해 금리, 환율 등 금융시장에 과도하게 개입해서 조작을 일삼는 게 아니냐는 의혹을 사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때문입니다.

 

살아 남기 위해 계속해서 비대해져야 하는 현재의 경제시스템이 지닌 속성 때문에 남의 것도 가져와야 하고, 자원을 더 써야 합니다. 경쟁은 불가피합니다. 소수의 기업이 상품 생산을 독점하면서, 사람들은 생산 수단과 기반을 잃고, 노동을 팔아 받은 임금으로 상품을 사다 쓰고 있습니다.

 

생산수단을 지배하는 기업들은 이익을 남기기 위해 원자재와 인건비 지출을 줄일 수 밖에 없는 노릇입니다. 이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기 보단 이익을 위한 반사회적인 본능을 자연스레 익히게 됩니다. 
 

반면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회시스템은 한쪽으로 쏠리면 다툼이 일어나고 불안해 집니다. 마치 밥을 한사람이 독차지 하면 싸움이 벌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또한 한정된 자연자원을 무리하게 계속 끌어다 사용하면, 고갈로 인해 순환하는 생명시스템이 망가집니다. 결국 자연은 생명체를 위한 활동을 조절할 수 없는 한계상황에 처할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살아남기 위해 계속해서 커져야만 하는 소수의 글레디에이터는 다른 기업들을 도태시키고, 많은 사람을 탈락시켜 곤경에 처하게 만듭니다. 한정된 자원에 대한 더 많은 수요는 결국 생명시스템을 마비시킬 수 밖에 없습니다.

 

요즘 인터넷상에서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는 소셜웹, 즉 '페이스북'과 '트위터'는 기술적으로 인터넷 게시판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매력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돋보이는 점은 바로 평등 분배입니다. 이것은 커다랗게 자리잡은 '뉴스' 또는 '콘텐츠' 아래 수많은 댓글을 쓴다고 해서, 정보 공급자와 평등해질 수 없는 인터넷신문 사이트나 기존의 포털과는 크게 다른 것입니다. 네트워크가 '정보'에서 '사람'으로, 시스템 중심에서 사회관계 중심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개인의 자율적인 선택의 폭 또한 넓어졌습니다. 자신에게 할당된 영역안에서 함께 할 사람을 선택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콘텐츠는 제거할 수도 있습니다.

 

온라인 게임시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패거리를 형성해서 상대와 싸우고 죽이는 게임들이 독점하다시피 했으나, 최근 들어 서로 힘을 모아 생명을 가꾸는 소셜팜 게임들이 온라인 게임시장의 새로운 틀을 갖춰가고 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동등한 몫을 지니고, 함께 하는 것처럼 좋은 경제 모델은 없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런 점을 무시하고 자꾸만 커져가는 몸집을 유지하기 위해 남의 것을 빼앗고, 개인을 착취하며, 자원을 써야 하는 폭주기관차의 종착역은 어딜까요?

폭주기관차는 멈추거나 속도를 줄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동안의 학습효과를 볼 때에 한계는 너무도 명확하게 드러나 보입니다. 균형과 안정이 깨진 불안한 사회시스템, 그리고 고갈로 인해 생명체 유지를 위한 능력을 상실한 생명시스템, 즉 '사람'과 '자연'이 가만히 있을 리 없습니다.

 

불균형과 희생을 담보로 한 성장은 반드시 대가를 치를 수 밖에 없는 노릇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선 구제역, 조류독감이 창궐해서 많은 동물들이 죽어갑니다. 지구촌도 예외가 아니어서 벌, 새, 물고기 등이 떼죽음을 당하고 있습니다. 기상이변이 속출하고 쓰나미와 지진과 같은 재앙이 눈에 띄게 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속수무책입니다. 사람은 과연 안전할까요?

 

세계경제는 비대해져 가는데, 굶어죽는 사람들은 늘어갑니다.

 

우리나라만 봐도 그러합니다. 설연휴를 맞아 규제완화, 세금감면과 같은 정책적 지원을 등에 업고 사상 최대의 이익을 거둬들인 대기업들은 직원들에게 몇백 퍼센트에 이르는 상여금을 준다고 합니다. 임금 챙겨주기에 급급한 중소기업들의 절박한 현실이 묘한 대조를 이룹니다. 우리 피붙이 들이 살고 있는 북녘 땅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최근 몇년간 우리는 굶주리는 그들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학문을 연마하고 진리를 탐구해서 우리 사회를 위한 인재로 거듭나야 하는 학생들은 비슷한 또래의 친구들을 누르고 이겨야 하는 취업 경쟁의 늪에 빠져, 자신의 적성이나 희망과는 무관하게 '입사'만을 위해 상품가치를 키우는 데에 급급해 합니다.

 

이들은 주변을 돌아다 볼 수 있는 여유 마저도 쉽사리 허락되지 않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고 중년 가장들이나 노인들 또한 빠듯하긴 마찬가지 입니다. 삶의 질과 가치는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낭만'이 돼가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머지 않아 '낭만'이 '망상'으로 전락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정부와 국회는 국가의 위상과 경제 지표는 나아지는데, 왜 이리 사람들의 불평이 갈수록 늘어나는지 곤혹스럽기만 합니다. 일부 탈락자들의 불만이라고 넘겨 버리기에는 상황이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점잖은 교수들까지 나서서 날선 비판을 서슴치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비판을 응원하고 나섰습니다. 진보 정치세력은 차치하더라도, 중도 성향을 띤 야당에다, 설상가상으로 여권의 유력 대권 후보까지 '복지'를 전면에 내세우고 나섰습니다. '영향력이 크다'는 언론들이 한 목소리로 '복지 포퓰리즘'을 운운하며 물타기에 나섰지만 신통치 않습니다.

 

복지 여론이 열기를 더할수록 정부와 여당은 구석으로 몰리는 듯 합니다. 정부와 여당은 힘센 기업을 키우는 게 나라경제 성장을 위한 빠르고 확실한 대안인데도, 개인들을 위해 많은 돈을 퍼부으라는 원성이 높아가니 답답할 따름입니다. 나라경제의 주도권 또한 정부와 국민으로 부터 소수의 '가진 자'쪽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가진 자'들의 따가운 눈총은 '조세정의' 운운하며 세금 더 걷겠다는 말을 꺼내지도 못하게 막고 있입니다.

 

'신기루' 같은 '이상'을 쫓자니 코 앞에 닥친 '현실'이 더 급해 보이고, 이것 저것 다 해보려니 나라돈이 여의치 않습니다. 사람들 또한 '해야 한다'면서도, 돈 문제는 쉽게 풀기 어려운 숙제로 남깁니다. 설상가상으로 복지를 둘러싼 논쟁은 조세와 재정 개혁, 예산분배의 효율성 논란으로 번졌습니다.

 

그렇다고 '멈추면 도태'라는 강박관념에 사로 잡힌 폭주기관차의 기관사 또한 여유롭지 못합니다.

 

누구도 행복하지 못한 경제시스템의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와중에, ‘복지’에 담긴 ‘평등한 분배’는 더 이상 '이상'이 아니라 모두가 살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으로 다가오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경제는 어차피 사람들에 의한, 사람들을 위한, 사람들의 시스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회, 그리고 우리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자연을 등지고, 경제만이 홀로 성장을 거듭할 수 없습니다.

 

멈추면 안되는 폭주기관차가 진정하기는 커녕, 더 크고 빠르게 내달리며 정신없이 우리 사회를 몰아세운다면, 그 끝은 '공멸'이 아닐까요? 사회시스템과 생명시스템이 망가지는 상황속에서 몸집을 더 부풀린 기관차가 계속해서 빠른 속도를 유지할 수 있는 여지는 없어 보입니다.

 

사람들은 시간과 자원의 한계가 머지 않았다는 것을 서서히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론에서 연일 떠들어 대는 기업경영 실적과 나라경제 성장이 자신의 삶과 무관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잦은 기상이변과 재앙은 예외를 두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한 때 우리 모두를 잘 살게 해줄 것이라는 폭주기관차가 고삐까지 풀어제친 채 더 빠르게 달리는 모습을 무섭게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속도를 늦춰야 한다는 얘기들이 베스트셀러로, 그리고 인터넷 이슈로 속속 등장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자원과 부가 한 쪽으로 쏠린다는 것은 한꺼번에 무너져 내릴 수 있는 극단적인 위험에 더 많이 노출되고 있다는 뜻과도 같습니다.

 

자원 고갈로 인해 망가지고 있는 생명시스템에 대한 논의는 뒤로 미룬다고 하더라도, 일단 사람들이 만들고 가꿔가는 사회시스템은 제대로 가동돼야 할 것입니다.

 

갈수록 몸집을 불리며, 멈출줄 모르는 폭주기관차가 누구도 바라지 않는 '괴물'로 둔갑하기 전에 연착시킬 수 밖에 없습니다. '자본'이 주인인양 행세하면서 정부, 기업, 사람, 자연 등 그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물신(物神)'으로 거듭나는 것은 일단 막고 봐야 할 일입니다. 날이 갈수록 '공멸'을 향해 속도를 더하며 달려가는 폭주기관차에 '사회'가 분노해야 합니다.

 

요즘 베스트셀러로 등장하고 있는 복고풍 사회과학서적, 그리고 인터넷에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소셜미디어는 표현의 차이는 있으나 한결같이 그 대안을 '복지'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공멸'을 막기 위한 다른 뾰족한 대안이 눈에 띄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대시대 우리 선조들은 이미 계, 두레, 품앗이와 같이 신뢰를 기반으로 한 공동체 정치 사회 경제 문화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따로 또 같이' 골고루 혜택을 나눠 갖는 것은 모두가 살아남기 위한 대안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렀고, 사람의 지식과 기술이 드높아졌다 한들, 많은 사람들이 '사회'를 이뤄 더불어 살아남기 위한 큰 틀은 변함이 없는 듯 합니다.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회', 그리고 생명을 위해 순환을 지속하는 '자연'이 망가진 '경제'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돌이켜 보면 우리 사회를 압박하는 '물신(物神)' 역시 많은 사람들을 잘 살게 만들 수 있는 대안이란 믿음 아래 서서히 성장해 왔습니다.

 

'물신(物神)'은 '경제'를 볼모삼아 '정부'와 '국회'를 하수인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또 '기업'을 숙주삼아, '사람'을 '상품'으로, '사회'를 '싸움터'로, '생명'을 '재앙'으로 전락시키고 있습니다.

 

이제는 숭배의 대상으로 훌쩍 커버린 '물신(物神)'을 위한 더 큰 공장보다, 사람과 생명을 위한 작은 텃밭이 필요한 때 입니다.

 

더 이상 '사람'과 '사회'보다 '경제'를 더 크게 키운 '지도자'가 많은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에게 있어 '복지'는 선택 가능한 '포퓰리즘'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단 하나의 '정답'일 따름입니다.

 

날이 갈수록 빠르게 다가오는 '공멸'을 막기 위해선 '복지'외엔 답이 없어 보입니다. 머리글에서 살펴봤듯이, 신이 우리에게 복을 베풀고 통제를 강제했다면, 복지는 '물신'에 맞서는 '전략'으로 자리할 것입니다.

 

'현실'의 그늘에 가려 오랜기간 잠자던 선인들의 지식 유산은 '전술'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구촌 사람들이 공유하는 '소셜네트워크'는 '무기'가 되리라 믿습니다. 또한 '소셜네트워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의병으로 나서 '물신'과 맞서는 '시민군'을 꾸릴 것입니다. '자본'이 쥐어 준 '스마트폰'이 그들을 옥죄는 도구로 자리잡는다는 묘한 반전이 흥미를 더하고 있습니다.

'공멸'을 막기 위한 '자본'에 대한 사람들의 저항은 오래전부터 있어 왔고, 예견된 것이기도 합니다.

 

얼마전 한국을 방문한 '유럽을 대표하는 지성' 자크 아탈리 국제빈민구제기구 회장이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남긴 말을 다시금 인용해 봅니다.

“세상을 이끌어 가는 근본적인 화두는 변하지 않는다. 기후변화처럼 약간의 새로운 이슈들이 추가될 뿐이다. 이전에 하던 고민 위에 어떤 것을 추가하고 누가 풀어 가느냐가 중요하다.” "과거 사회구조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선 시스템 자체를 바꿔야 한다."

이런 그가 내세운 전제는 "시민의식과 노동문화의 정착" 이었습니다. 이는 '복지'를 위한 첫 걸음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사회시스템이 '물신'을 통제하지 못 하거나, '믿음'에 기반한 사람들의 네트워크가 끊긴다면, 인내에 한계를 느낀 '자연'의 생명시스템이 스스로 살기 위해 '물신(物神)'과 '사람의 사회'를 억제하려 할 것입니다. 그것은 곧 '재앙'이자 '공멸'을 의미합니다.

자연의 생명시스템은 '신의 섭리'를 따를 뿐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 놓고 제어하지 못하는 '물신'의 함정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면, 하늘(신), 땅(자연), 사람(사회)가 조화를 이루는 우리의 세상인 '삼태극'(참고 http://me2.kr/M7MIFEM )이 깨져 버리는 극단적인 상황을 스스로 초래할 것입니다.

 

하늘의 아들이 '생명의 나무'를 버리고 스스로 '선'과 '악'을 구분짓는 '선악의 나무'를 선택할 때부터 비극은 예고된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제 사람의 사회는 스스로 만든 '물신(物神)'이란 우상을 버리고, '생명의 나무'를 되돌아 봐야 할 때입니다.

 

Copyleft NewsKing 2011.01.21. newsking@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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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zfarm.kr